용산 개발의 시작점, 사람이 살던 군사기지
용산은 조선시대 한강을 통해 물자가 모이던 포구이자 상업의 거점 역할을 수행했다.
만초천을 따라 배가 이동하며 물류 하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현재 미군 부대 자리는 과거 사람들이 살던 거주지였다.
용산이 과거 군사 요충지에서 현대 서울의 핵심 개발지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드러나는 복잡한 역사적 배경과 현재의 개발 과제를 조명한다.
용산은 조선시대 한강을 통해 물자가 모이던 포구이자 상업의 거점 역할을 수행했다.
만초천을 따라 배가 이동하며 물류 하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으며, 현재 미군 부대 자리는 과거 사람들이 살던 거주지였다.
청나라 상인과 일본 상인 간의 경제적 경쟁이 벌어졌고, 청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하며 용산 지역의 주도권을 장악했다.
서울로 들어왔던 일본군을 만주 지역으로 보내기 위한 철도 입구로 용산역이 건설되었고, 경의선은 군용 철도로 운영되었다.
당시 용산은 유럽까지 이어지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출발점 역할을 수행하며 국제적인 연계성을 가졌다.
현재 용산이 국제 업무지구로 개발되려는 움직임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지니지만, 당시에는 무역보다는 전쟁을 위한 병참 기지로서의 기능이 더 강했다.
일본은 당초 300만 평 규모의 군사기지 조성을 요구했으나, 조선인들의 강력한 반발로 인해 최종적으로 150만 평으로 타협했다.
이로 인해 기존 용산에 거주하던 조선인들은 한남동과 보광동 등 주변 지역으로 이주해야 했다.
용산 기지 주변의 한남동과 보광동은 주민 이주 과정에서 형성된 대표적인 마을이다.
남산 서북쪽 지역은 식민 통치 기구가 집중되어 있었고, 한강에 인접한 구용산 일대는 일본인 거주지였다.
이 두 지역 사이에 넓은 평지가 있었던 용산은 일본군 기지로 활용하기에 적합한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기존 조선인 주민들은 한남동, 보광동 등 용산 외곽 지역으로 이주하여 주거지를 형성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인 거주지와 조선인 거주지가 엄격하게 분리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이는 용산이 식민지 군사 거점으로 변화하는 과정에서 나타난 대표적인 현상이었다.
일본군 기지가 있던 용산의 중심부는 해방 후 미군 기지로 공여되면서 한국의 주권이 미치지 못하는 공간이 되었고, 이는 용산 개발의 가장 큰 제약이 되었다.
미군 기지 주변으로는 미군을 대상으로 하는 이태원, 해방촌 등의 기지촌이 형성되어 독특한 문화와 경제 활동을 가능하게 했다.
군무원들이 PX 물건을 유출하면서 암시장이 형성되는 등 특수한 경제 구조가 발전했다.
고향에 돌아와도 일자리가 없어 생계를 위해 서울로 집중되었고, 북한에서 월남한 인구도 함께 유입되면서 서울의 인구가 급증했다.
월남민을 비롯한 귀환 동포들은 서울역 등지에서 노숙하며 정착지를 모색했고, 사유지보다는 국유지를 선호했다.
사유지는 강제 퇴거의 위험이 높았던 반면, 조선총독부나 경성부가 소유했던 적산 부지인 국유지는 상대적으로 안전하다고 여겨져 판자촌이 집중적으로 형성되었다.
가장 가기 편한 곳은 구유지입니다. 사유지면 쫓겨날 수 있잖아요. 국유지면은 그 가능성이 조금 덜하다고 느껴요.
경성호국신사로 오르던 108계단은 후암동과 해방촌의 명확한 분기점으로 여겨진다.
후암동은 일본인 부유층의 거주지이자 적산 가옥이 불하된 지역으로, 해방촌은 판자촌을 중심으로 이태원은 미군을 대상으로 한 상권으로 각각 특색 있게 분화되었다.
미군 상주 지역이라는 특수성으로 인해 통금 예외가 적용되었고, 밤새도록 활동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한국 대중음악의 전파지 역할까지 수행했다.
해방 전 대륙 진출의 출발점이었던 용산역은 휴전 이후 경의선이 단절되며 그 위상을 상실했다.
호남선이 연결되었음에도 경부선 위주로 재편된 철도망으로 인해 저개발이 고착화되었고, 1980년대 전자상가 조성과 2000년대 국제업무지구 추진을 통해 변화를 시도했다.
과거 1기 오세훈 시장 재임 시 개발이 추진되었으나, 서부이촌동 일대와의 연계 문제로 난항을 겪다 무산되었고, 박원순 시장 시기에는 계획이 전면 재검토되었다.
현재 2기 오세훈 시장 체제에서는 서부이촌동을 제외하고 정비창 구역을 중심으로 개발이 다시 추진되고 있다.
1966년 강변북로 건설 과정에서 공유수면 매립을 통해 조성된 이촌동은 동부와 서부의 성격이 확연히 달랐다.
동부이촌동은 공무원 등 당시 중산층을 겨냥하여 계획적으로 대단지 아파트가 건설되었으며, 한일 수교 후 일본인들이 대거 유입되어 '리틀 도쿄'를 형성했다.
서부이촌동은 좁은 면적 탓에 소규모 연립주택 위주로 개발되어 재개발 과정에서 난항을 겪을 것으로 예상되었다.
국가에서 특정 계층을 계산하여 주거 공간을 조성했다는 점에서 동부이촌동은 용산 개발의 중요한 사례로 꼽힌다.
국가유산청은 일제강점기 및 미군기지 시절의 건물이 혼재된 해당 지역의 역사적 보존 가치를 강조하며, 지역사회에서도 이해관계자의 플래카드가 매일 바뀔 정도로 갈등이 심화되고 있다.
각각의 부처들이 이곳을 어떤 식으로 활용하고 어떤 식으로 재장이라고 할까요? 그 할 것인가를 놓고 치열하게 갈등을 할 수밖에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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