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베르트 콜데바이, 바빌론 유적 발굴과 성경 속 바빌론의 실존 증명
그는 20m까지 파들어간 유적지에서 수십만 점의 점토판과 유물을 출토해 베를린으로 가져갔으나, 발굴 터가 실제 바벨탑이라는 명확한 고고학적 증거는 확보하지 못했다.
그는 발굴된 유물을 500 상자에 담아 베를린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곤 수만 점에 달하는 파편들을 꿰맞추기 시작했죠.
성경 속 바빌론의 실체와 고대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지대한 영향력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 조명한다.
그는 20m까지 파들어간 유적지에서 수십만 점의 점토판과 유물을 출토해 베를린으로 가져갔으나, 발굴 터가 실제 바벨탑이라는 명확한 고고학적 증거는 확보하지 못했다.
그는 발굴된 유물을 500 상자에 담아 베를린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리곤 수만 점에 달하는 파편들을 꿰맞추기 시작했죠.
전쟁이 이어지는 와중에도 유적지 내부에 자신의 별장을 짓는 등 유적에 대한 집착을 보였다.
그의 사후 바빌론 복원에 대한 열망은 순식간에 좌절되었다. 당시 그가 유적지 위에 건설했던 궁은 시민들에 의해 훼손되었다.
메소포타미아 지역은 인류 역사상 최초로 관계 농업을 시작하여 잉여 생산물을 얻었으며, 이를 관리하고 분배하는 과정에서 공동체 생활이 시작됐다.
수확량을 기록하기 위한 필요성으로 기호와 문자가 탄생했고, 60진법 등 오늘날의 지적 체계가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비롯됐다.
아시리아는 바빌론을 정복한 후에도 메소포타미아의 상징적 중심지로 여겨 경계했으며, 바빌론 없이는 메소포타미아 문화의 존립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이에 아시리아 왕들은 바빌론을 파괴했다가 곧바로 다시 재건하기를 반복하며 메소포타미아 전역을 아우르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바빌론은 돌이 귀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흑벽돌과 갈대, 모르타르를 사용해 강도를 높인 14m 높이의 3중 성벽으로 외부와 중심부를 철저히 분리했다.
또한 해자를 건설하고 유프라테스 강을 도시 내부로 끌어들여 수상도시처럼 운영했으며, 인류 역사상 최초의 인공 하수 시스템을 도입한 것으로 알려졌다.
바빌론은 강목 3.6m 간격 배치와 구운 벽돌을 사용하고 레바논산 실론 삼나무로 강물 방수 처리를 한 세계 최첨단의 다리 공법을 자랑했다.
전쟁의 신 이슈타르의 이름을 딴 이슈타르 문을 포함해 적을 방어하기 위한 이름의 성문들로 철저한 보안을 유지했다.
바빌론의 성문에는 황소로 상징되는 날씨의 신 아다드, 바빌론의 주신 마르둑의 상징인 용, 그리고 왕을 상징하는 사자 등의 부조가 새겨졌다.
이러한 동물 형상들은 야간 조명을 활용하여 적에게 극도의 공포감을 심어주는 효과적인 심리적 장치 역할을 했다.
기원전 5세기, 역사의 아버지 헤로도토스가 기록한 바빌론의 결혼 관습은 여자가 남자가 자신을 고를 때까지 기다리는 방식이었다.
남자는 자신이 고른 여자에게 상당한 액수의 돈을 지불한 후 성지 이외의 곳에서 함께 거주했으며, 이는 강요가 아닌 자유 의지에 기반한 시장 풍경으로 유럽인의 바빌론에 대한 환상을 자극했다.
바빌론 신년 축제는 춘분기에 맞춰 약 12일간 진행되었으며, 혼란을 잠재우고 질서를 세운 마르둑 신을 경배하는 날로 기념됐다.
축제 마지막 날에는 여러 지방의 신들을 태운 행렬이 바빌론의 중심인 바벨탑에 모여들었으며, 왕이 마르둑으로부터 권력을 위임받는 중요한 국가적 의식이었다.
기원전 597년 네브카드네자르 2세의 예루살렘 정복으로 솔로몬 성전이 파괴되고 귀족들이 강제 압송되는 바빌론 유수가 발생했다.
불모의 사막 한가운데 건설된 바빌론은 유대인들이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도시였으며, 포로들에게는 경외감과 동시에 공포의 대상이었다.
성경 기록 속 바빌론의 부정적 묘사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에서 비롯되었으며, 바벨탑을 오만함의 상징으로 규정한 이유도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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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고고학자 로베르트 콜데바이는 18년간의 발굴을 통해 가로와 세로가 91.5m인 거대한 사각형 건물 터를 발견했다.
이 수치는 고대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가 기록한 바벨탑의 90m 수치와 근소한 차이로 일치하며, 유럽 화가들의 상상력과 다른 실제 설계의 모습을 확인시켰다.
밑면과 높이가 각각 91m라는 기록은 헤로도토스의 기술과 일치하며 콜데바이의 발굴 결과에 설득력을 더했다.
점토판에는 바벨탑의 밑면과 높이가 각각 91m로 명시되어 있었으며, 이는 헤로도토스 기록과 일치하여 로베르트 콜데바이의 발굴 주장에 더욱 설득력을 더했다.
런던 대학 앤드류 조지 교수가 찾아낸 석비에는 네브카드네자르 2세의 이름과 함께 탑의 건설 시기 및 모양이 상세히 담겼다.
이 석비에는 놀랍게도 탑의 모양은 물론 건설 시기와 왕의 이름까지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기록된 왕의 이름은 바빌론 유수를 일으켰던 네브카드네자르 2세(느브갓네살)로 확인되었다.
고고학자들은 바벨탑 터를 조사하는 과정에서 그 내부에 더 작은 규모의 이전 탑 흔적이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나보폴라사르 왕은 기존 탑을 91m 규모로 확장하려 했으나 15m만 올린 채 사망했으며, 그의 아들 네브카드네자르 2세가 공사를 이어받아 완공했다.
바빌론 건축가들은 서아시아 사람들에게 부와 행운을 뜻하는 푸른색 라피스 라줄리(청금석) 색상을 모방한 자기 벽돌을 사용했다.
벽돌을 굽는 고온을 유지하기 위해 지역 자원인 석유를 사용했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고대 바빌론의 고도의 기술력을 짐작하게 한다.
또한 검고 끈적끈적한 천연 아스팔트인 역청을 모르타르 및 방수 재료로 활용하여 홍수에 대비하는 신기술을 선보였다.
이러한 건축 기술은 당시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수준의 정교함과 실용성을 겸비한 것으로 평가받는다.
바벨탑은 성경에 기록된 신의 징벌이 아닌, 기원전 482년 페르시아의 침략으로 완전히 파괴되었다.
이후 바벨탑은 복구되지 못하고 이 지역을 점령했던 많은 사람들에 의해 질 좋은 벽돌이 캐내어져 집을 짓는 것은 물론 다양한 건설 재료로 무단 반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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