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 독일의 2인자, 공군을 창시한 제국원수 헤르만 괴링
원본 영상 0:36나치 독일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헤르만 괴링은 독일 공군(루프트바페)의 창시자이자 초대 총사령관이었다. 그는 히틀러 다음가는 권력자인 제국원수(Reichsmarschall) 직위를 가졌으며, 제3제국의 사실상 2인자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신인균은 "독일 공군 창시자이며 독일 공군 원수 제국원수 제3제국의 이인자였던 헤르만 괴링 이야기입니다"라고 말했다.
헤르만 괴링의 독단적 판단과 권력욕이 독일의 주요 전술적 실패로 이어지며 나치 패망을 앞당겼다는 분석이 나왔다.
이 채널 새 영상도 이렇게 정리해 드릴까요?
나치 독일의 핵심 인물 중 한 명인 헤르만 괴링은 독일 공군(루프트바페)의 창시자이자 초대 총사령관이었다. 그는 히틀러 다음가는 권력자인 제국원수(Reichsmarschall) 직위를 가졌으며, 제3제국의 사실상 2인자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신인균은 "독일 공군 창시자이며 독일 공군 원수 제국원수 제3제국의 이인자였던 헤르만 괴링 이야기입니다"라고 말했다.
1893년 로젠하임에서 태어난 괴링은 1차 세계대전에 육군 소위로 임관해 참전하며 뛰어난 군사적 능력을 보였다. 그는 1급과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고, 독일 최고 무공 훈장인 푸르르 메리트 훈장을 수훈했으며, 독일군 격추 순위 56위(22대 격추)에 오르는 에이스 조종사였다.
전쟁 후 괴링은 1922년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즉 나치당에 입당하며 정치 경력을 시작했다.
신인균은 나치당의 공식 명칭인 '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을 근거로 나치당이 극좌파라고 주장했다. 그는 당명에 '사회주의'와 '노동자'라는 좌파적 단어가 두 개나 포함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하며, 나치가 극좌 이념을 지녔다고 해석했다.
신인균은 "나치당의 이름 한번 보십시오. 국가 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 좌파를 상징하는 단어가 두 개나 나오죠. 사회주의 노동자. 그러면 나치는 극좌입니다"라고 설명했다.
괴링은 1923년 뮌헨 폭동에 히틀러와 함께 주도적으로 참여했다가 총상을 입었다. 이 부상 이후 극심한 고통을 잊기 위해 필로폰에 손을 댔고, 죽을 때까지 필로폰 중독자로 살았다는 설이 제기되었다.
신인균은 "뮌헨에서 히틀러와 함께 폭동을 주도했습니다. 그러다가 총상을 입고 도주했는데, 이때부터 필로폰 중독자가 되었다. 고통을 잊기 위해서 죽을 때까지 필로폰을 했다고 합니다"라고 전했다.
히틀러의 깊은 신임을 받던 괴링은 나치 정권 내에서 막강한 권력을 독점했다. 그는 국회의장, 항공장관, 프로이센 주지사, 공군 총사령관, 경제계획부 장관 등 수많은 핵심 요직을 겸임하며 권력을 휘둘렀다.
신인균은 "국회의장 겸 항공장관 겸 프로이센 주지사 겸 공군 총사령관 겸 경제 계획부 장관이 되었어요"라며 그의 권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설명했다.
괴링은 히틀러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쳤으며, 히틀러의 말이라면 어떤 것이든 무조건적으로 따랐다. 그는 '총통께서 결정하시면 나는 한다', '총통의 말씀은 모두 옳다'는 식으로 히틀러의 모든 발언을 옹호하고 정당화했다.
신인균은 이를 황관 조고의 '지록위마'에 비유하며, "총통께서 2+2=5라면 그런 것이다. 지록위마 사슴을 갖다 주면서 이거 말이다라고 했을 때 다른 신하들이 그거 사슴이잖아 말 못 하게 한 그런 거 똑같은 거죠"라고 설명했다.
스페인 내전 당시 독일은 프랑코 진영을 지원했지만, 괴링은 이 와중에 정부군(인민전선)에게 무기를 몰래 팔아넘기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였다. 이러한 사실이 드러나자 프랑코 총통은 크게 분노했고, 결국 스페인은 제2차 세계대전에서 추축국에 합류하지 않았다.
신인균은 "프랑코를 지원하면서 알고 보니까 뒤로 정부군의 무기를 팔아먹고 있었던 겁니다. 그래서 프란시스코 프랑코가 완전히 열받아 버렸어요. 스페인은 2차 대전에서 추축국이 되지 않았습니다"라고 밝혔다.
덩케르크 철수 이후 독일은 영국 본토 상륙 작전인 '바다 사자 작전'을 준비하며 육군과 해군이 협력하고 있었다. 그러나 공군 총사령관 괴링은 공군 단독으로 영국을 제압할 수 있다고 호언장담하며 독단적으로 영국 본토 공습을 강행했다.
신인균은 "잠깐 너들 상륙하기 전에 우리가 먼저 해. 우리가 다 할 수 있어. 내가 공군 총사령관이니까 공군이 다 할 수 있어"라고 괴링의 발언을 인용했다.
1940년 7월 10일부터 10월 31일까지 4개월간 진행된 영국 본토 항공전에서 독일 공군은 핵심 전력인 항공기 1,887대를 손실하는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독일군은 장거리 전투기와 중폭격기의 부재로 영국 본토 깊숙한 곳까지 타격하는 데 한계가 있었고, 결국 영국 항공전에서 패배하며 유럽 제공권을 연합군에 내주게 되었다.
신인균은 "4개월간 공군 핵심 전력인 1887대의 항공기를 잃으니까 독일 공군 전력이 그냥 날개가 다 꺾어 버렸죠. 그래서 제공권이 계속 이제 연합군에 끌려가는 계기가 됩니다"라고 분석했다.
괴링은 '제국의 날개 달린 모든 것은 내 소관'이라는 독점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그의 고집으로 인해 독일 해군은 항공모함을 건조하려 했으나, 공군의 반대에 부딪혀 무산되었다.
결과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 해군은 단 한 척의 항공모함도 운용하지 못하게 되었고, 이는 해상 작전에서 치명적인 약점으로 작용했다.
북아프리카 전역에서 에르빈 롬멜 장군이 이끄는 독일군은 버나드 몽고메리 장군의 영국군과 교전하고 있었다. 1942년 7월 27일 엘알라메인 전투 이후 롬멜은 미국의 막대한 군수 물자 지원을 받는 영국군에 밀리자 지원을 요청했다.
그러나 괴링은 미국의 군수 물자가 뛰어나다는 롬멜의 보고를 무시하고 '정신력'만으로 승리할 수 있다고 주장하며 지원을 거부했다. 그는 "미국 그까지 그 면독이나 만드는 놈들 그 무기 때문에 진다고 하는 것은 정신력이 없어서 그런 거야. 정신력 무장을 하면 이길 수 있단 말이야"라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결국 괴링의 이 같은 판단 착오와 정신력 만능주의는 북아프리카 전선의 독일군 패퇴로 이어지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괴링은 공군 산하에 '헤르만 괴링 기갑 사단'을 비롯해 무려 25개에 달하는 야전 사단을 창설했다. 당시 독일 지상군은 국방군과 무장 친위대로 이미 이원화되어 지휘 체계가 복잡하고 경쟁적인 상황이었다.
여기에 공군 소속 지상군 부대까지 추가되면서 독일군의 지휘 체계는 더욱 혼란스러워졌고, 이는 전술적 비효율과 작전 실패의 주요 원인이 되었다.
신인균은 "치상군 작전이 안 그래도 지금 SS 무장친위대와 국방군 이렇게 이원화되어서 서로 경쟁해서 지금 지위 체계가 혼란스러운데 여기다가 공군까지 지상군 사단을 무려 25개나 만드니까 이게 뭐 지위체계가 혼선이 돼서 제대로 작전이 안 되는 거죠"라고 지적했다.
1942년 겨울,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 제6군이 소련군에 포위되면서 심각한 보급난에 직면했다. 제6군 사령관 프리드리히 파울루스 원수는 히틀러에게 철수를 요청했지만, 괴링은 공군 총사령관으로서 항공 보급을 책임지겠다고 호언장담했다.
괴링은 "우리 공군이 항공 복급을 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저 급이 안 된다는 말은 거짓말입니다. 우리 할 수 있어요. 보급할 수 있어요"라고 자신만만하게 보고했다.
그러나 혹한과 소련군의 저항으로 항공 보급은 사실상 불가능했으며, 괴링의 오판은 결국 25만 명에 달하는 제6군이 전멸하는 비극으로 이어졌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전환점이자 독일 패망의 결정적인 원인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
괴링의 무책임한 약속과 판단 착오는 수많은 독일 병사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독일의 전쟁 수행 능력에 막대한 타격을 입혔다.
자막에서 근거가 되는 대목을 찾아 답합니다.
이 채널 새 영상도 이렇게 정리해 드릴까요?
신인균의 국방TV에 새 영상이 올라오면, 방금 읽으신 것처럼 정리해서 메일로 보내 드릴게요.
이 채널은 지난 7일 동안 9편 올렸어요.
숏츠는 빼고 보내 드려요. 메일이 필요 없어지면 언제든 구독을 끄실 수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