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 이대원 작가 21년 만의 회고전 개최
이번 전시에는 이대원 작가의 유화 120여 점이 출품됐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은 2005년 작고한 작가의 사후 21년 만에 처음으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고 설명했다.
작가가 2005년에 작고한 이후 21년 만에 처음 열리는 전시회로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유화 120여 점이 출품되어 작가의 폭넓은 작품 세계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한국 미술사에서 '고난의 서사'가 부족해 저평가됐던 이대원 화가의 작품 세계가 재조명된다.
이번 전시에는 이대원 작가의 유화 120여 점이 출품됐다. 국립현대미술관 덕수궁은 2005년 작고한 작가의 사후 21년 만에 처음으로 대규모 회고전을 열었다고 설명했다.
작가가 2005년에 작고한 이후 21년 만에 처음 열리는 전시회로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다.
이번 전시에는 유화 120여 점이 출품되어 작가의 폭넓은 작품 세계를 감상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이대원 작가는 뛰어난 실력과 영향력을 지녔음에도 불구하고, 대중적 인지도가 상대적으로 낮은 편이다.
이세라 대표는 이대원 작가에게 '가장 행복한 화가'라는 수식어가 붙은 배경으로, 고난과 역경을 강조하는 극적인 서사의 부재를 꼽았다.
이대원 작가는 파주 과수원집 아들로 태어나 유복한 환경에서 성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대학 입학 기념으로 아버지에게 15,000평 규모의 농원을 선물 받았으며, 이 농원은 그가 30년 동안 반복해서 그린 농원 풍경 작품들의 실제 배경이 되었다.
이대원 작가는 36세이던 1957년, 하버드 국제 세미나에 초청받아 미국에 방문했다.
당시 젊은 교수였던 헨리 키신저가 이대원 작가를 직접 초청했으며, 이는 미국이 냉전 시대에 네트워크 구축을 위해 젊은 엘리트들을 모집하던 시기의 일이었다.
이대원 작가는 단순히 고난을 겪지 않은 화가가 아니라, 화면에서 슬픔을 의도적으로 지우는 선택을 했다.
영문판 도록은 이러한 예술적 선택을 'Choose'라는 단어로 정의하며 작가의 주체적인 의지를 드러냈다.
이는 밝고 행복한 이미지를 통해 세상을 기록하고 싶어 했던 이대원 작가의 독자적인 예술관을 보여준다.
그는 개인적인 비극을 작품 전면에 내세우기보다, 자연과 농원의 생명력을 화사한 색채로 표현하며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했다.
이대원 작가는 대학 입학 당시 아버지의 반대로 도쿄 미술학교 진학이 좌절됐다.
법대를 졸업하고 해방과 전쟁이라는 비극적인 현대사를 겪으며 전업 미술가로 늦게 데뷔했지만, 미술을 전공하지 않았음에도 평생 그림을 놓지 않았다.
이대원 작가는 학병 징집, 아버지 실종, 작은형 납북 등 시대적 비극을 개인적으로 겪었다.
그러나 그가 부유한 집안 환경에서 자랐고 대학 입학 선물로 1만 5천 평의 땅을 받았다는 사실이 그의 고난을 가리는 측면이 있었다.
이러한 배경 때문에 작가의 슬픈 서사가 대중에게 충분히 공감을 얻지 못하고, '팔자 좋은 화가'라는 오해를 받게 된 것으로 보인다.
유복함이 비극적 개인사를 희석시켜 대중이 작가의 고난에 이입하기 어려웠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이대원 작가는 자신만의 고난 서사를 만들지 않았지만, 박수근, 김환기 등 다른 작가들의 서사를 구축하는 데 적극적으로 기여했다.
그는 박수근 유작전 실행위원으로 참여하여 박완서의 수필 속 기억을 복원하는 데 도움을 줬으며, 해외 컬렉터들에게 동료 화가들의 작품을 소개하고 판매하기도 했다.
또한 김환기 회고전 추진위원으로 참여하는 등 타인의 서사를 세우는 일에 헌신적으로 임했다.
미술계에서는 오랫동안 밝고 잘 팔리는 그림, 즉 상업적이고 장식적인 그림을 저평가하는 관행이 있었다.
고난과 극복을 예술의 절대적 잣대로 삼는 미술사적 시각이 이 작가를 향한 정당한 평가를 가로막았다는 것이 이 대표의 판단이다.
미술사는 그림 자체보다는 작가의 서사에 가치를 부여하는 경향이 있어 이대원 작가의 작품이 저평가되었다.
이중섭의 작품이 슬프게 느껴지는 것은 단순히 기법 때문이 아니라 작가의 비극적인 개인사가 깊이 개입하기 때문이다.
이대원 작가는 이처럼 강력한 고난의 서사가 부재했기 때문에 미술사적 평가에서 상대적으로 낮은 위치에 놓이게 된 것으로 분석된다.
미술계는 작가의 삶의 고통과 역경을 예술적 진정성의 증표로 여기는 경향이 강해, 이대원의 밝고 행복한 화풍은 오히려 그의 예술성을 의심받는 원인이 되었다.
이대원 작가는 경성 제2고보(현 경복고) 미술 교사였던 사토 구니오를 자신의 작품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스승으로 꼽았다.
사토 구니오는 유영국, 장욱진, 권옥연 등 당대 한국 유명 화가들의 스승이었으며, 한국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고 피카소나 입체주의 화풍을 학생들에게 전수했다.
그는 조선 공예품을 특히 좋아했다고 알려져 있으며, 제자들에게 서양 미술의 새로운 경향과 함께 한국적 아름다움에 대한 인식을 심어주었다.
이 대표는 한국 미술사가 앵포르멜이나 단색화, 민중미술 등 특정 사조 위주로만 정리되어 온 점을 꼬집었다.
이대원 작가의 작품은 이러한 어느 특정 사조에도 속하지 않아, 한국 미술사에서 그의 위치를 설정하기가 애매했던 측면이 있다.
이대원 작가는 1959년 유럽 방문 직후 앵포르멜의 영향을 받아 '제화분'과 같은 작품을 제작했다.
이 시기 작품들은 거친 질감과 어두운 색채를 사용한 실험적인 모습을 보였으나, 그는 기존 사조에 머무르지 않고 빠르게 자신만의 독자적인 스타일을 찾아 확립했다.
이대원의 작품이 '거실 그림'으로 불리는 현상에 대해 이 대표는 감상과 소유의 개념을 구분할 필요가 있다고 보았다.
연구나 학술적 평가 대상이 되는 그림과, 실제 거주 공간에 걸고 싶어 하는 행복한 이미지의 그림은 다를 수 있다고 보았다.
고뇌가 담긴 화풍보다 심리적 안정을 주는 그림을 침실이나 거실에 배치하려는 대중의 기호가 반영된 결과다.
이를 단순히 폄하할 것이 아니라 대중이 진정으로 선호하는 소유 가치로서 인정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한스 에빙의 저서 '왜 예술가는 가난해야 할까'를 인용해 예술계의 편협한 통념을 짚어낸 이 대표는, 결국 그 좁은 시각이 이 작가의 저평가로 이어졌다고 덧붙였다.
예술계는 오랫동안 예술가의 가난을 예술적 진정성의 증표로 소비해 왔으며, 돈을 쫓지 않거나 고통 속에 죽는 것을 '진짜' 예술가의 증거로 여겼다.
반대로 상업적 성공을 거둔 작가에게는 진정성이 없다는 낙인을 찍는 편견이 존재해왔다.
이대원 작가가 받았던 저평가는 이러한 예술계의 편협한 통념에 원인을 두고 있다고 이세라 대표는 설명했다.
이대원 작가는 80세에 중국어 공부를 시작할 정도로 삶에 대한 끊임없는 호기심과 능동적인 태도를 보여주었다.
이는 그가 흥미롭거나 필요하다고 생각되는 일이 있으면 언제든지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열린 자세를 가졌음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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