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관동 대지진, 조선인 7천 명 이상 희생
원본 영상 0:571923년 9월 1일, 일본의 관동, 현재 도쿄와 요코하마 지역에서 규모 7.9의 강진이 발생했습니다. 이 강진으로 인해 상하이 임시정부 추산으로 6,666명에서 7,000명에 달하는 동포가 희생되었습니다.
독일 외무부 자료에 따르면 최소 15,000명에서 20,000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1923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학살은 일본 정부가 의도적으로 조작한 유언비어 때문에 발생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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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년 9월 1일, 일본의 관동, 현재 도쿄와 요코하마 지역에서 규모 7.9의 강진이 발생했습니다. 이 강진으로 인해 상하이 임시정부 추산으로 6,666명에서 7,000명에 달하는 동포가 희생되었습니다.
독일 외무부 자료에 따르면 최소 15,000명에서 20,000명에 이르는 사망자가 발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조선인들이 우물에 독을 탔다는 유언비어는 자연적으로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일본 정부가 의도적으로 조작하고 배포한 것으로 드러났습니다.
이는 국가 기관이 개입하여 조선인을 대상으로 한 조직적인 제노사이드를 유도하려 한 사건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1차 세계 대전 중 군수 물자 판매로 전쟁 호황을 누리던 일본 경제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거품이 빠지며 위기를 맞았습니다. 실업자가 급증하고 민심이 흉흉해졌습니다.
이러한 경제 위기 속에서 조선인 노동자들과의 일자리 경쟁이 심화되면서 일본 사회 내부에 조선인에 대한 혐오 감정이 확산되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내부의 경제적 문제와 흉흉한 민심을 해결하는 대신, 외부의 적을 만들어 대중의 시선을 돌리는 방법을 택했습니다. 이는 통치자들이 자주 사용하는 손쉬운 방법이었습니다.
일본 정부는 경제적 어려움 속에서 조선인들이 일본인의 일자리를 빼앗고 있다는 혐오 감정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며 불만 세력의 타깃을 조선인으로 설정했습니다.
당시 일본 도쿄는 대부분 목조 건물로 이루어져 있어 지진 발생 시 화재에 매우 취약했습니다. 점심 식사를 위해 불을 지폈던 가정들이 지진으로 무너지면서 도쿄 전체가 순식간에 불바다가 되었습니다.
이 대화재로 인해 지진 사망자 10만 명, 실종자 포함 총 15만 명에 달하는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추산됩니다.
내무대신 미즈노 렌타로는 내각 회의에서 조선인들이 폭탄을 던지고 불을 지르고 있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이를 기정사실화했습니다. 출처를 묻는 질문에는 '누군가 했고 내가 들었다'고 모호하게 답했습니다.
이러한 허위 사실 유포는 조선인 학살을 정당화하고 선동하는 배경이 되었으며, 이 사건은 영화 '박열'의 배경이 된 중요한 역사적 사실입니다.
미즈노 렌타로는 1895년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경복궁 담을 넘어 침입하여 시해에 가담했던 인물입니다.
미즈노 렌타로는 도쿄제국대 법대 출신의 엘리트 관료였으나, 명성황후 시해 사건 당시 경복궁 담을 넘어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등 조선에 대한 적대적인 개입을 지속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과거 행적은 이후 관동대지진 당시 조선인 유언비어 날조에 이르는 일련의 악행과 연결됩니다.
3·1운동 직후 일본 측 주장에만 하더라도 7천 명 이상의 조선인이 학살당하는 참상이 벌어졌습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65세의 강우규 의사는 사이토 총독을 처단하기 위한 의거를 결심하게 됩니다.
강우규 의사의 폭탄 투척으로 사이토 총독은 피했지만, 바로 뒤에 있던 미즈노 렌타로가 폭탄 파편에 맞아 부상을 당했습니다.
이 사건 이후 미즈노 렌타로는 조선인에 대해 더욱 강한 적개심을 품게 되었으며, 이는 관동대지진 유언비어 날조의 한 배경이 됩니다.
강우규 의사를 체포한 인물은 같은 조선인인 악질 형사 김태석이었습니다.
김태석은 해방 후 반민특위 조사 도중 풀려났으며, 이후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없이 사라졌습니다.
대지진 당시 일본 내무장관이었던 미즈노 렌타로는 내각 회의에서 '조선인이 폭동을 일으킨다'는 허위 사실을 유포하며 조선인 학살을 조장했습니다.
그는 경시청 홍보 담당 쇼리키 마스타로를 통해 이 허위 사실이 기자들에게 기정사실처럼 배포되도록 지시했습니다.
이 양반이 일본 내무 장관이었잖아요. 그때 대지진 때. 그래서 그 회의 때 그렇게 한 거지. 아무리 봐도 조센징이 지금 폭탄지고 지르고 있다고.
경시청 홍보 담당이었던 쇼리키 마스타로는 미즈노 렌타로의 지시를 받아 조선인 유언비어를 기자들에게 뿌려 기사화하도록 주도했습니다. 그는 이후 경찰을 그만두고 거의 도산 직전이었던 요미우리 신문을 인수했습니다.
쇼리키 마스타로는 요미우리 신문을 살리기 위해 당시 전 세계적으로 유행하던 프로 스포츠인 야구에 주목했습니다. 그는 1934년 베이브 루스 등 미국 프로야구 올스타팀을 일본으로 초청하여 친선 경기를 개최하고, 이를 통해 일본 내 프로야구에 대한 관심을 증폭시켰습니다.
이후 그는 요미우리 신문의 부흥을 위해 일본 최초의 프로야구단인 '대일본도쿄야구클럽'(현 요미우리 자이언츠)을 창설하여 요미우리 신문과 함께 크게 성장시켰습니다.
재판 전, 박열은 어머니께 전할 사진을 찍기 위해 가네코 후미코와 함께 사진관을 찾았습니다. 원래는 남자가 뒤에 서 있고 여자가 의자에 앉는 전형적인 포즈를 찍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가네코 후미코가 박열에게 안기면서 찍힌 사진이 두 사람의 마지막 모습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예상대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는 모두 사형 선고를 받았습니다. 재판 결과에 대해 박열은 당당하게 응수했습니다.
박열은 판사에게 '당신들이 내 육신은 없앨 수 있겠지만, 내 정신은 건드리지 못한다. 결국 내가 승리자다'라고 말하며 불굴의 정신을 보여주었습니다.
일본은 국제적 여론을 의식하여 일본 왕의 은사로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의 사형을 무기징역으로 감형했습니다. 이는 일본의 잔인함에 대한 비난 여론을 잠재우기 위한 시도였습니다.
그러나 감형 직후 가네코 후미코는 감방 안에서 갑자기 죽음을 맞이했으며, 그 죽음은 여전히 의문사로 남아 여러 가지 추측을 낳고 있습니다.
22년 만에 출소한 박열은 김구 선생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습니다. 김구 선생은 박열에게 '내가 죽인 아들 세 명의 유해가 일본 땅에 있다.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내 아들들이다. 박열, 네가 지금 석방됐다는 소식을 들었으니 네가 가서 내 아들 유해를 찾으라'고 부탁했습니다.
박열은 김구 선생의 부탁을 받고 미친 듯이 찾아다닌 끝에 이봉창, 윤봉길, 백정기 의사의 유해를 모두 찾아냈고, 이 유해들은 조국으로 봉환되어 효창공원에 안장되었습니다.
관동 대학살의 희생자 수는 일본 정부 공식 발표 6,600명과 독립신문 등 당시 발표 1만 5천 명에서 2만 명 사이로 큰 차이를 보이며 논란이 되고 있습니다. 이처럼 희생자 수조차 명확히 밝히지 않고 있습니다.
일본 정부는 아직까지도 '일본 정부가 이를 부추겼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우리가 사과의 주체가 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며 공식적인 사과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자막에서 근거가 되는 대목을 찾아 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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