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폭 희생자 대다수 조선인… 일본, 1990년대까지 은폐
Jump to 2:27썬킴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피해자 중 조선인 희생자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일본 정부가 이 사실을 1990년대 초반까지 은폐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방사능의 위험성을 몰랐던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게 폭격으로 인한 낙진 청소를 시켰고, 이 과정에서 많은 조선인이 방사능에 피폭돼 사망했다고 설명했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의 다수가 조선인이었으며, 일본은 천황제 유지를 위해 항복을 지연시켜 피해를 확대했다는 주장이 제기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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썬킴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자폭탄 피해자 중 조선인 희생자가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일본 정부가 이 사실을 1990년대 초반까지 은폐했다고 주장했다. 그는 방사능의 위험성을 몰랐던 당시 일본인들이 조선인들에게 폭격으로 인한 낙진 청소를 시켰고, 이 과정에서 많은 조선인이 방사능에 피폭돼 사망했다고 설명했다.
당시 히로시마에 조선인이 많았던 배경에는 경상남도 지역 주민들의 강제 동원이 있었다고 썬킴은 설명했다. 1920~30년대 경남 지역은 수해 등으로 농사가 어려워 살기 힘들어졌고, 일본에 일자리가 있다는 소식에 많은 조선인이 히로시마로 이주했다. 히로시마는 당시 일본 남부의 공업 중심지였기 때문에 일자리가 풍부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썬킴은 원폭 피해 2세들의 고통을 언급하며 김열 선생의 사례를 소개했다. 김열 선생은 아버지나 어머니가 히로시마에서 피폭된 이후 태어났지만, 피폭의 영향으로 인한 2세, 3세의 건강 이상을 증명할 방법이 없었다고 한다. 1970년에 태어나 35세에 사망한 김열 선생은 몸이 성치 않았음에도 병원에서 이유를 알 수 없자, 스스로 도서관에서 의학 논문을 찾아 연구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 의학 교수의 논문에서 자신과 관련된 사례를 발견했다. 논문에 등장한 여성은 6세 때 히로시마에서 피폭당했고, 이후 낳은 쌍둥이 중 한 명은 사망하고 다른 한 명이 겨우 살아남았는데, 그 살아남은 아이가 바로 김열 선생이었다는 것이다. 이처럼 김열 선생은 스스로 자신의 질병 원인이 원폭 피폭에 있음을 증명하려 노력했으나, 안타깝게도 이른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미국은 소련에 태평양 전쟁 참전을 요청했다. 당시 미국이 일본과 단독으로 싸우며 지쳐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히틀러 패망 후 태평양 전쟁에 참전하여 미국과 일본의 전쟁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은 이후 태평양 전선의 전개와 일본의 항복에 중요한 영향을 미치게 된다. 소련의 참전은 일본에 대한 압박을 가중시키는 요인이 될 것이었다.
일본 본토 공습 시 B-29 폭격기가 난항을 겪었던 이유 중 하나로 제트기류가 지목됐다. 보통 지상 8km 정도에서 서쪽에서 동쪽으로 부는 제트기류 때문에, 10km 상공에서 폭탄을 투하하면 폭탄이 바람에 날아가 버려 정확한 폭격이 어려웠다는 설명이다. 이는 미국이 일본 본토에 대한 효과적인 공습 전략을 모색하는 데 걸림돌이 되었다.
썬킴은 1945년 3월 10일 도쿄 대공습으로 인한 사망자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원폭 희생자를 합친 것보다 많았다고 주장했다. 당시 도쿄 인구 600만 명 중 200만 명으로 줄어들었고, 현장에서 즉사한 사람만 20만 명이 넘는 엄청난 인명 피해가 발생했다는 것이다. 이 발언은 일본이 원폭 이전에도 이미 심각한 피해를 겪고 있었음을 강조한다.
도쿄 대공습으로 수도가 불바다가 되고 20만 명이 사망하는 엄청난 피해를 겪었음에도 불구하고, 당시 일본 군부는 항복 대신 결사항전을 고수했다. 썬킴은 일본 군부가 오히려 '1억 옥쇄'를 외치며 국민들에게 천황을 위해 목숨을 바치라고 독려했다고 전했다. 이는 극한 상황에서도 천황제를 수호하려는 일본 군부의 강경한 태도가 얼마나 뿌리 깊었는지를 보여준다.
1945년 7월 26일, 영국, 미국, 소련은 포츠담 회담을 통해 일본에 최후 통첩을 보냈다. 일본은 무조건 항복하지 않으면 완전히 파괴될 것이라는 내용이었다. 이는 미국이 일본에 대한 최종적인 압박 수단으로 핵폭탄 사용을 염두에 두고 있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썬킴은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기 하루 전인 7월 25일에 이미 핵 투하 명령서가 작성되었다는 사실을 밝혔다. 이는 미국이 일본의 무조건 항복을 촉구하면서도, 이미 핵폭탄 사용을 결정한 상태에서 최후 통첩을 보냈음을 의미한다. 즉, 일본의 항복 여부와 관계없이 핵폭탄 사용이 기정사실화되었을 가능성을 제기하는 발언이다.
이러한 사실은 미국의 핵 사용 결정이 일본의 항복 지연에 대한 단순한 대응을 넘어, 전쟁을 조기에 끝내기 위한 사전 계획이었을 수 있다는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일본에게 선택의 여지가 없는 상황에서 포츠담 선언이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당시 상황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능하게 한다.
포츠담 선언 이후 일본 내각에서는 항복을 주장하는 온건파와 끝까지 싸우자는 강경파 사이에 팽팽한 대립이 이어졌다. 썬킴은 이러한 내부 갈등으로 인해 일본이 항복 결정을 계속 지체했다고 설명했다. 이는 핵폭탄 투하의 결정적 원인 중 하나로 작용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내각의 의견 대립은 결국 일본이 중요한 결정을 제때 내리지 못하고 시간을 허비하게 만들었다. 이로 인해 일본은 외교적 기회를 상실하고, 전쟁의 비극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분석이 가능하다. 일본 지도층의 갈등과 무능함이 국민들의 희생으로 이어졌다는 비판이 제기될 수 있는 대목이다.
핵폭탄 투하 대상 도시 선정 기준은 폭격 피해가 없던 곳이어야 했다고 썬킴은 밝혔다. 이는 핵폭탄이 떨어진 후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 정확하게 연구하고 측정하기 위함이었다. 기존 폭격으로 이미 파괴된 도시는 핵폭탄의 위력을 제대로 파악하기 어렵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미국 전쟁 장관 헨리 스팀슨의 개인적인 경험 때문에 교토가 핵폭탄 투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는 일화가 소개됐다. 스팀슨 장관은 신혼여행으로 교토를 방문해 매우 좋은 기억을 가지고 있었고, 아름다운 도시를 파괴해서는 안 된다는 이유를 들었다. 그는 또한 일본의 천년 수도인 교토를 파괴할 경우 일본인들이 끝까지 저항할 것이라는 명분을 내세워 교토를 폭격 대상에서 제외시켰다고 한다. 이 결정은 전쟁 장관의 개인적 감정이 전쟁의 방향에 영향을 미쳤음을 보여준다.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히로시마에 B-29 폭격기 세 대가 나타났을 때, 공습 경보가 울렸다가 곧 해제되었다고 한다. 썬킴은 당시 수십 대가 와야 폭격으로 인지했는데, 세 대만 오자 정찰 비행기로 오인하여 공습 경보를 해제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 오판이 히로시마 시민들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미국이 히로시마의 실제 피해를 담은 다큐멘터리 '히로시마 75년 후'를 70년 동안 비공개로 유지하다가 처음으로 공개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썬킴은 영상 내용이 너무 잔인했기 때문에 공개를 미뤄왔다고 설명했다. 이 다큐멘터리는 핵폭탄의 참혹한 결과를 전 세계에 알리는 중요한 자료가 되었을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영상 공개 지연은 핵무기 사용의 윤리적 문제와 전쟁의 잔혹성에 대한 논의를 다시 불러일으키고 있다. 70년 동안 숨겨진 진실이 세상에 드러나면서 전쟁 범죄와 인도적 문제에 대한 국제사회의 관심이 증폭될 것으로 보인다.
일본은 항복 결정을 하면서도 천황제의 유지를 보장받으려 했고, 이 때문에 항복을 하루 이틀 더 지체했다고 썬킴은 지적했다. 이는 일본 군부와 지도층이 국가의 존망보다 천황제의 존속을 더 중요하게 여겼음을 보여준다.
이러한 지연은 불필요한 인명 피해를 더욱 키웠을 가능성이 크다. 핵폭탄 투하라는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천황의 지위를 지키려 했던 일본 지도부의 태도는 당시 일본 사회의 특수성을 드러내는 대목이다.
그래서 항복을 하는데 천황제를 유지해 줄 것인가 아닌가 확답을 받으려고 이거 가지고 하루 이틀 더 시간을 끈 거예요.
천황의 종전 결정이 내려지자 일본군 내 젊은 장교들이 이에 반발하여 쿠데타를 시도했다. 8월 15일 종전 선언 직전, 이들은 일본 황궁에 쳐들어가 천황의 결정을 취소하려 했다고 썬킴은 전했다. 이는 일본 군부 내부에서도 천황의 결정에 대한 불복종과 무조건 항전 의지가 강하게 남아있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종전 후 일본을 점령한 맥아더 장군은 히로이토 천황에게 '인간 선언'을 지시했다. 이는 1946년 1월 1일 국회에서 연설을 통해 천황이 더 이상 신이 아닌 인간임을 선언하도록 한 조치였다. 썬킴은 이와 함께 맥아더와 히로이토 천황이 함께 찍은 사진이 천황의 권위를 실추시키는 굴욕적인 기념사진이었다고 평가했다. 이는 일본의 탈신격화와 민주화 과정을 상징하는 중요한 사건이었다.
썬킴은 일본이 1945년 3월 도쿄 대공습 당시 항복했더라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비극은 없었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일본이 끝까지 '1억 옥쇄'를 주장하며 항복을 거부했고, 그 결과 핵폭탄 두 발을 맞았으며, 이 과정에서 수만 명에 달하는 조선인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지적했다. 이는 일본의 강경한 태도와 천황제 고수 의지가 막대한 인명 피해와 특히 조선인 희생을 초래했다는 비판적인 시각을 드러낸다.
일본의 지도부가 국민의 생명보다 체제 유지를 우선시한 결과가 원폭의 참혹한 비극으로 이어졌다는 주장은 역사적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전쟁 막바지의 일본의 선택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삶을 앗아갔는지 다시금 상기시키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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