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이 필요한 것을 보장하지 않는다
통장의 숫자는 그대로여도 살 수 있는 것의 양은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문제 제기다. 돈은 찍어낼 수 있어도 반도체 공장이나 건물은 찍어낸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통장 잔고는 그대로여도 살 수 있는 것의 양은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 이하경 작가의 진단이다
통장의 숫자는 그대로여도 살 수 있는 것의 양은 줄어들 수 있다는 것이 그의 문제 제기다. 돈은 찍어낼 수 있어도 반도체 공장이나 건물은 찍어낸다고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는 팬데믹만의 특수 상황이 아니라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2021년에는 자동차 산업에서도 비슷한 일이 있었다. 반도체 부족으로 차 한 대를 받으려면 1년 반에서 2년을 기다려야 했다.
돈을 더 낸다고 물량을 확보할 수 있는 시대는 끝났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다. 가격보다 누가 먼저 생산 능력을 배정받느냐가 중요해졌다.
기업들은 높은 가격을 제시하는 대신 몇 년치 물량을 한꺼번에 사겠다고 약속하거나, 생산 시설 증설에 필요한 자금과 위험을 함께 부담하는 방식으로 행동을 바꿨다.
부자 나라가 가난한 나라보다 낫다는 점은 맞다. 그러나 이하경 작가는 부자 나라를 부자로 만드는 것은 돈의 양이 아니라 실제로 만들어 내는 물건과 서비스의 양이라고 반박한다.
돈을 찍는다고 공장이 세워지거나 쌀이 더 나오지는 않는다. 생산은 그대로인데 돈만 늘면 같은 물건을 더 비싸게 사야 할 뿐이라는 것이 그의 설명이다.
그는 이제 돈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물질과 기술을 얼마나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느냐가 중요해졌다고 말한다.
그는 돈이 짐이 되는 시대라는 키워드를 든다. 돈이 많다는 것과 그 돈이 경제 곳곳으로 잘 흐른다는 것은 다른 얘기라는 것이다.
이를 상수원과 수도관에 비유한다. 중앙은행이 찍는 돈은 상수원의 고인 물이고, 가정과 기업에 닿는 돈은 수도관을 흐르는 물이라는 설명이다.
이하경 작가는 은행이 대출을 해주는 순간 그 사람의 통장에 없던 돈이 생겨난다고 설명한다. 반대로 빚을 갚으면 그 돈은 사라진다.
지금의 돈은 누군가 빌릴 때 태어나고 누군가 갚을 때 사라지는 시스템이며, 이 구조는 신용을 기반으로 작동한다.
모두가 빚을 갚기만 하고 새로 빌리지 않으면 돈이 돌지 않아 시중 자금이 줄고 경제가 휘청거린다. 저수지의 물이 가득해도 다들 목말라 죽을 수 있다는 비유가 나온다.
미국 국채는 정부가 돈을 빌릴 때 발행하는 채권이라는 이해가 일반적이다. 그러나 국제 금융 시장에서 미국 국채가 갖는 의미는 훨씬 더 크다.
금융기관이 돈을 빌릴 때 가장 널리 쓰는 담보가 미국 국채다. 예를 들어 어떤 금융기관이 미국 국채 1억 달러를 맡기면 다른 금융기관이 단기 자금을 빌려준다. 이를 레포 거래라고 한다.
이 담보를 받아 돈을 융통하는 은행과 증권사를 그는 배관공이라고 부른다. 미국 국채가 배관을 이루는 재료라면, 금융기관은 실제로 돈이 흐르게 하는 배관공이라는 것이다.
쏟아지는 국채를 배관공인 은행들이 받아 줘야 했지만 자본 규제로 운신의 폭이 좁아져 받아줄 여력이 없었다. 상수원에 물이 많아도 배관이 좁거나 배관공이 역할을 못 하면 흐름은 멈춘다.
결국 연준이 직접 대규모로 국채를 사들여 시장이 안정됐다. 담보로 쓸 국채가 많아도 받아 줄 배관공의 창고가 적으면 돈은 흐르지 않는다는 것이 이 사례의 교훈이다.
흔히 미국은 기술, 중국은 자원이라는 구도로 경쟁을 설명하지만 이것만으로는 지금의 경쟁을 설명하기 어렵다는 것이 이하경 작가의 진단이다. 두 나라는 같은 목표를 향해 반대 방향에서 달리고 있다.
중국은 희토류의 원소를 분리하고 정제·가공해 상용화하는 기술을 오랫동안 연구해 왔다. 자원보다 이 과정이 더 중요하며, 쉽게 따라잡을 수 없다는 설명이다. 중국이 희토류 수출을 막으면 미국은 달러가 많아도 필요한 물량을 제때 구하기 어렵다.
미국은 AI 최첨단 반도체 수출을 통제해 중국이 돈이 많아도 원하는 만큼 살 수 없게 했다. 그러나 미국은 기술만으로는 부족하다는 것을 깨닫고 반도체 공장을 국내로 불러들이고 광물 공급망을 새로 짜고 있다. 중국도 자원과 제조만으로는 부족해 반도체와 AI 기술을 스스로 키우고 있다.
두 진영을 연결하는 나라의 가치가 오히려 높아질 수 있다는 역설이다.
중국에서 부품을 생산해 베트남으로 보내고 베트남에서 가공·조립해 미국으로 수출하는 방식이 대표 사례로 제시된다. 포장만 바꿔서는 원산지로 인정받지 못하고, 실제 공장 운영과 부품 조달 기록이 필요해 기업 비용이 늘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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