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연구의 기준, 1차 사료는 '당대 기록'
회고록과 달리 일기나 재판 기록처럼 당시 기록된 1차 사료는 사실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기, 재판 기록 등이 1차 사료의 예시이며, 기억에 의존한 회고록은 미화되거나 왜곡될 가능성이 있어 1차 사료와는 구분된다는 판단이다.
박종인 전 조선일보 선임기자가 이회영의 신흥무관학교 설립 신화가 1차 사료와 달리 회고록을 중심으로 조작됐다고 지적했다.
회고록과 달리 일기나 재판 기록처럼 당시 기록된 1차 사료는 사실에 가깝다는 평가를 받는다.
일기, 재판 기록 등이 1차 사료의 예시이며, 기억에 의존한 회고록은 미화되거나 왜곡될 가능성이 있어 1차 사료와는 구분된다는 판단이다.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 직후 안창호의 수사 기록에 따르면 신민회 조직 초기 멤버로 이갑, 유동열, 이동휘, 전덕기, 이동영, 양기탁 등이 언급된다.
이 기록 어디에도 이회영의 이름은 신민회 창립 초기 멤버 명단에 등장하지 않는다.
백범일지에는 신민회 조직과 만주 무관학교 창설에 관여한 인물로 양기탁, 이동영, 이승훈, 이갑, 김구 등이 기록되어 있다.
양기탁, 안태국, 이승훈, 전덕기, 이동영, 주진수, 이갑, 이종호, 최광옥, 김홍양 등과 신민대를 조직했으나, 이 명단 어디에도 이회영의 이름은 없다.
그러나 특정 시점부터 이시영의 기록이 이회영으로 둔갑하여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광수는 기록에서 이시영이 서관도, 최석하가 북경을 맡았다고 분담 사실을 명시하며 인물을 바로잡았다.
이는 1985년 이회영 회고록 발간 이후 기존 1차 사료와의 불일치를 해결하려는 의도로 수정된 것으로 의심된다.
도산 안창호라고 돼 있는 부분을 이회영으로 횡으로 바꿔놨습니다. 그리고 밑에 서관도로 보내는 사람을 이시형과 최석하라고 돼 있었는데 앞에 이회영을 집어넣어 버렸습니다.
일제가 조선인 동향을 파악하기 위해 생산한 밀정 보고서는 자기들의 이익을 위해 작성된 만큼 의도적인 조작 가능성이 낮다고 평가된다.
이 보고서는 조선 사람들이 보라고 만든 것이 아니라 일본의 필요에 의해 작성된 것이므로, 당시 인물과 상황 파악에 있어 정확도가 높은 기록으로 활용된다는 판단이다.
석주 이상용의 '석주유고'에는 이회영이 대표 사자로 파견되어 간청한 것으로 나오나, 기념관 연보에는 그가 원세개와 단독 회담하여 문제를 해결한 것처럼 적혀 있다.
'석주유고'에는 석주 이상용이 이회영과 이봉, 이석영 등에게 있는 이회영을 대표로 선출해 봉천성 관청에 경내 거주 허락과 민적 취득을 간청했다는 내용이 확인된다.
이로 인해 이회영이 원세개와 단독으로 문제를 해결한 것이 아니라 대표단 사자로 파견된 것으로 파악된다.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데이터베이스에 공개된 이 원문과 번역본은 제3자의 밀착 정보라는 점에서 가치가 높다.
밀정 보고서들은 이석영이 자금을 관리하고 이시영은 야전 사령관 겸 지도자로 활동했다고 기록하며 백화일기 등의 내용과 일치한다.
1914년 일본 영사관 경찰이 정리한 불령선인 50명 명단에 따르면 이시영 6형제의 역할이 구체적으로 분담되어 있었다.
이시영은 서관도 중앙기독교회 통령이자 신흥학교의 창립자로 기록되었으며, 신흥학교를 무관학교로 칭하며 불온 사상을 고취하고 서관도 제1의 수령으로 추대된 것으로 나타난다.
이석영은 재산 총괄, 이철영은 신흥학교 교장 역할을 맡았고, 이회영은 심부름꾼인 사자(使者) 역할로 명시되었다.
기존 학계에서 이회영을 모든 일의 주체로 주장하는 것과 일본 사료는 상반된다는 입장이다.
일본 밀정 보고서에 따르면 이회영은 연해주와 북경, 조선 안동현을 오가며 심부름꾼 역할에 그쳤으며, 이시영이 총괄, 이석영이 자금, 이회영이 실무 실행을 담당한 것으로 기록된다.
이 회영이라는 사람은 그냥 연해주, 북경, 조선 안동현 이런 데 왔다 갔다 하면서 하던 심부름꾼이었죠. 존재감이 확 떨어지는 사람입니다. 위에서 결정한 바대로 실행을 했던 실무적인 그런 역할, 크게 보면 그 역할을 하지 않았나 합니다.
해방 후 독립운동 기록이 부족하여 독립운동가 인정 과정에서 '인우보증' 기법이 주로 사용되었다.
초기 독립운동사는 일본과 국교가 없던 시기 회고록에 전적으로 의존해 작성되었고, 이 과정에서 청산리·봉오동 대첩 등 독립운동 기록의 수치가 과장되거나 신화화되는 문제가 발생했다.
1차 사료에는 자금을 담당했던 이석영과 모든 망명 활동을 뒷받침하고 지휘했던 이시영의 이름이 주로 나타나는 반면, 이회영의 존재감은 미미하다는 설명이다.
문중이 선조를 미화하려는 족보식 회고록에 기댄 기념관 기록은 역사적 근거가 부족하다.
이회영 문중을 선양하기 위해 회고록 외의 사료를 무시하는 학자들의 행태를 비판하며, 이들을 '용역 업자'에 비유했다.
객관적인 사료 분석 없이 특정 인물의 업적만을 부각하는 연구 태도가 독립운동사 연구의 신뢰성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를 표했다.
사료를 통해 가짜임이 드러난 이상 기념관 사업은 즉각 철회해야 한다.
서울시가 역사적 사실을 외면하며 고수하는 기념관 설립에 대해 공론화를 통한 철회를 요구한다.
이회영은 1932년 아나키스트 운동 중 일본 요인 암살 시도 과정에서 검거되어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나키즘 운동이 독립운동인지에 대해서는 별도의 판단이 필요하며, 만주 신흥무관학교의 실제 공적은 이시영 등에게 있다는 점을 들어 재검토가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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