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화된 한일 관계, 대마도 조선 통신사 행렬 축제 축소
최근 대마도에서 매년 8월에 열리던 조선 통신사 행렬 축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던 조선 통신사 행렬이 빠졌습니다. 또한 축제 이름도 '아리랑 축제'에서 '아리랑'이라는 명칭이 사라지는 등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는 최근 악화된 한일 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과거 한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했던 대마도에서 조선 통신사들이 수시로 오가며 교류했던 역사와는 상반된 모습입니다.
조선 초기 대마도 정벌부터 외교관 이예의 활약, 그리고 현대 한일 관계의 흐름까지, 역사 속에서 회복의 실마리를 찾아봅니다.
최근 대마도에서 매년 8월에 열리던 조선 통신사 행렬 축제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겨지던 조선 통신사 행렬이 빠졌습니다. 또한 축제 이름도 '아리랑 축제'에서 '아리랑'이라는 명칭이 사라지는 등 변화가 있었습니다.
이는 최근 악화된 한일 관계를 반영하는 것으로, 과거 한국과 일본을 연결하는 다리 역할을 했던 대마도에서 조선 통신사들이 수시로 오가며 교류했던 역사와는 상반된 모습입니다.
1419년 5월, 조선은 왜구의 약탈에 대한 응징을 위해 총지휘자 이종무 장군을 중심으로 대규모 병력을 동원하여 대마도 정벌에 나섰습니다. 정벌군은 227척의 전함과 1만 7천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대마도로 향했습니다.
조선의 군선 수십 척이 해안에 정박한 뒤 왜구의 본거지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고, 대마도에 상륙한 정벌군은 왜구들과 맞서 싸워 적선을 빼앗고 도적의 가옥을 불태우는 등 왜구를 토벌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는 왜구 침략에 시달리던 조선이 무력으로 왜구를 제압한 역사적인 사건입니다.
역사적으로 대마도 정벌은 세 차례에 걸쳐 이루어졌습니다. 1차 정벌은 고려 창왕 대 박위가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으며, 2차는 조선 태조 대에, 그리고 가장 널리 알려진 3차 정벌은 세종 원년에 이종무 장군이 지휘했습니다.
당시 왜구의 침입은 고려가 멸망하고 조선이 건국되는 과정에서도 큰 변수가 될 만큼 심각했습니다. 세종 원년에는 충청도 비인현에 대규모 왜구 약탈이 발생하여 조선의 병선 7척이 불타고 군인 300여 명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이에 조선은 본때를 보여줘야 한다는 차원에서 대마도 정벌을 결정했습니다.
조선은 대마도 정벌을 위해 65일치 식량을 준비하여 장기전을 계획했습니다. 당시 수군 병력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17,285명의 병사와 227척의 군선, 그리고 65일분의 식량을 동원한 것은 대규모 원정단으로 볼 수 있습니다.
건국 초기에 이러한 대대적인 정벌은 큰 부담이 될 수 있었지만, 세종이 즉위하면서 국가의 기틀이 어느 정도 잡힌 상황에서 조선의 군사적인 힘을 확실히 보여줘 왜구의 침범을 막고자 하는 의도가 있었습니다.
대마도 두지포에 도착한 정벌군은 외구의 저항을 물리치고 진격하여 중국인 포로 130명을 구출하고 왜구 포로 2명을 잡았으며, 114명을 사살하고 가옥 1,939호를 불태우는 등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왜구는 산골짜기로 숨어 들어갔습니다.
숨어 있는 왜구를 소탕하기 위해 수색 부대를 결정할 때 세 개 부대 중 한 개 부대만 들어가도 충분하다고 판단하여 제비뽑기를 실시했습니다. 이는 어느 부대가 들어가도 임무 수행이 가능하다는 자신감과 더불어 전공을 세워주기 위한 배려 차원도 있었습니다.
그 중요한 업무를 유무를 하러 가는데 재비 뽑기를 한다고요?
무력으로 왜구를 제압한 조선은 한반도 남부의 세 항구, 제포, 연포, 부산포(삼포)를 개항했습니다. 이는 왜구에게 교역을 보장하여 약탈자에서 이웃으로 만들고자 한 회유책이었습니다. 이로 인해 삼포는 조선과 일본의 평화적인 무역 중심지로 발전하게 됩니다.
조선은 강경책만으로는 외구를 완전히 막을 수 없다고 판단하여 이른바 '햇볕 정책'을 병행했습니다. 투항한 왜구에게는 조선의 관직을 부여하여 '수직왜인'으로 임명하는 등 이들을 끌어안으려는 조치를 취했습니다. 이는 채찍과 당근을 동시에 사용하는 양면 전략으로, 약탈자를 정상적인 방법으로 교역하여 먹고 살게 함으로써 외구 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고민의 결과였습니다.
삼포 개항 이후, 좋은 조건 때문에 조선 지역으로 외인들이 대거 유입되기 시작했습니다. 세종 초기에는 약 60호 정도였던 외인 거주 가구 수가 세종 대에 이르러 452호로 크게 증가했습니다. 이는 마치 차이나타운처럼 조선 내에 일본인 집단 거주지인 '재팬타운'이 형성된 것과 같습니다.
외인들의 유입은 무역 활성화에 기여하여 조선이 국제 무역항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조선인과 외인 사이에 협업이나 동업이 이루어지는 등 경제 활동이 매우 활발해졌습니다. 그러나 무분별하게 들어오는 외인들 중 일부는 행패를 부리거나 도둑질을 일삼고, 심지어 조선의 국방 기밀까지 빼돌리는 등의 부정적인 문제도 발생했습니다.
대마도는 국토의 90%가 산지인 척박한 지형으로 인해 식량을 외부에서 조달해야 했습니다. 일본 본토의 원조만으로는 생존이 어려웠고, 오히려 조선의 경제적 원조 없이는 독립적인 유지가 불가능한 구조였습니다. 조선은 식량 외에도 말린 고기, 호피, 소주 등을 대마도에 하사하며 지원했습니다.
조선의 이러한 경제적 지원은 대마도와의 평화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습니다. 대마도가 가까운 한반도를 침략 대상으로 삼을 수밖에 없었던 상황에서 조선의 물질적인 지원은 왜구의 침략을 막기 위한 중요한 외교적 수단이었습니다.
외교관 이예는 태조에서 세종 연간까지 약 73회에 걸쳐 이루어진 포로 송환의 대부분을 담당했습니다. 그는 40여 차례 일본을 방문하며 당시 조선 최고의 일본 통으로 평가받았습니다. 이예는 대마도에 직접 잡혀갔다 온 경험을 바탕으로 현지 사정에 매우 밝았으며, 뛰어난 언어 구사 능력과 전문 지식, 협상력을 갖춘 인물이었습니다.
특히 세종은 56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이예를 일본 사신으로 파견하며 직접 갓과 신발을 하사할 정도로 그를 신임했습니다. 이는 이예가 한일 관계에 있어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보여줍니다. 그의 노력으로 조선과 일본 간에는 평화의 시대가 찾아올 수 있었습니다.
이예는 아전 출신으로 양반이 아니었으며, 밑바닥 삶을 경험하며 사람들의 정서, 특히 포로와 같은 어려운 처지의 사람들을 잘 이해했습니다. 이러한 경험은 그가 외교관으로서 능력을 쌓는 데 큰 도움이 되었고, 일본과의 40여 차례 외교 활동을 통해 신뢰를 얻고 좋은 성과를 낼 수 있었습니다.
이예는 당시로서는 드물게 하급 공무원에서 차관급에 해당하는 높은 관직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입니다. 이는 외교가 단순히 엘리트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라,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와 철학적 접근, 그리고 국익을 도모하는 본질적인 노력이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이예는 71세의 고령에도 불구하고 외교관으로서 활발히 활동했으며, 2년 전인 71세에 '계해약조'를 체결했습니다. 계해약조는 세견선(해마다 보내는 배)의 숫자를 50척으로 제한하고, 세사미두(해마다 하사하는 쌀과 콩)를 200석으로 제한하는 규정을 담고 있습니다.
이 약조는 조선과 대마도 사이의 외교 관계를 정례화하고 이후 대일 체제의 기본 틀을 마련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이예는 죽는 순간까지 외교관으로 활동하며 '영원한 현역'이라는 평가를 받았는데, 이는 당시 일본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인물로서 스스로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책임감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조선 태종 때 일본은 조선에 코끼리를 선물했습니다. 이는 일본이 조선의 유명한 불경(대장경)을 얻기 위한 담례품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나라에는 일찍이 없었던 것이다'라고 기록되어 있으며, 당시 코끼리는 '고길이'라고 불리다 후에 '코끼리'로 변화한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러나 코끼리가 공조전서 이우를 밟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처우에 대한 논의가 뜨거웠습니다. 죽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었지만, 일본과의 외교적 마찰을 우려하여 죽이지 않고 전라도 장도로 유배를 보냈습니다. 이는 희귀 동물이자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한 고육지책이었습니다.
유배된 코끼리의 사육은 막대한 식량 소비로 인해 지방 관청에 큰 부담을 주었습니다. 백성들이 굶주리는 상황에서 코끼리에게만 목초를 제공하는 것은 큰 골칫거리였습니다.
결국 전라도 관찰사는 상소를 올려 다른 도에서도 코끼리 사육을 분담할 수 있도록 해달라고 요청했습니다. 이에 경상도와 충청도가 코끼리 사육을 분담하게 되었으며, 유배지에서도 먹이를 주던 종을 밟아 죽이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습니다.
신숙주가 집필한 '해동제국기'는 일본으로 가는 사신단의 필수 서적이 될 만큼 일본 외교의 중요한 지침서 역할을 했습니다. 이 책에는 중국어와 유구어 등 실용에 필요한 내용이 담겨 있으며, 후대에는 회화가 필요한 사람들을 위해 '음번역'이라는 부록이 추가되기도 했습니다.
신숙주는 해동제국기 서문을 통해 일본인들의 풍습과 습성을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그는 일본인들이 강하고 사나우며 무술에 능하고 배타기에 익숙하며, 수가 틀리면 언제든 침략할 수 있는 호전적인 근성을 가지고 있음을 간파하고 조선 내부의 정비와 대비의 필요성을 강조했습니다. 이는 약 500여 년 전에 이미 일본의 호전성을 꿰뚫어 본 통찰력으로 평가됩니다.
일본 내각부에서 1980년대부터 실시된 한국에 대한 친근감 조사에 따르면, 2011년에는 한국을 좋아한다고 대답한 일본 국민이 전체의 63%에 달하며 미국에 이은 2위를 기록했습니다. 이는 2000년대 월드컵과 한류 붐을 계기로 한국에 대한 호감이 크게 증가한 결과였습니다.
그러나 2012년 독도를 둘러싼 한일 갈등이 표면화되면서 여론은 급격히 바뀌었습니다. 작년(2013년) 조사에서는 한국에 대해 친근감을 느낀다는 사람은 불과 30% 정도였고, 친근감을 느끼지 않는 사람이 60%를 넘어 친근감 여론이 역전되는 상황을 보였습니다.
김경주 교수는 일본의 우경화에 대처하기 위해 정부 차원에서는 중장기적인 '전략적인 대화'를 제기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일반 여론 태도에 있어서는 자유와 민주주의라는 '공통의 가치'를 되새겨야 한다고 제안했습니다. 동북아 지역에서 자유와 민주주의 가치를 공유하는 나라는 많지 않으므로, 일본과의 협력을 통해 외교 안보적 성과를 얻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은 역사적으로 일본이 내부적으로 혼란스러울 때 침략으로 나오는 경향이 반복되었음을 지적합니다. 고려 말 조선 초의 왜구 침입, 임진왜란, 근대 제국주의의 강화도 조약 등이 그 예입니다. 따라서 역사를 정확히 진단하고 현재 상황에 연결하여 되풀이하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 잘 지켜나가야 합니다.
한중일 3국이 역사 전쟁에만 매몰될 것이 아니라, 공존과 번영, 평화를 위해 같은 곳을 바라보는 노력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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