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군 패망의 주역, ‘3대 오물’ 무다구치 렌야 중장
그의 대표적인 실패작은 바로 인팔 작전으로, 이 작전은 일본군의 대규모 인명 손실을 초래한 참극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인균은 "일본 군주의자들로부터 3대 오물 쓰레기다 이거죠. 3대 오물로 불리는 것 중에서 최대 오물로 평가받고 있는 무다구치 레냐 중장"이라고 설명하며, 이처럼 정치 군인들의 개입이 군대와 국민에게 얼마나 큰 비극을 가져왔는지 조명했다.
무능과 부패, 독단으로 얼룩진 지휘관들의 행태가 일본군의 패망을 이끌었다는 분석이 나왔다.
그의 대표적인 실패작은 바로 인팔 작전으로, 이 작전은 일본군의 대규모 인명 손실을 초래한 참극으로 기록되어 있다.
신인균은 "일본 군주의자들로부터 3대 오물 쓰레기다 이거죠. 3대 오물로 불리는 것 중에서 최대 오물로 평가받고 있는 무다구치 레냐 중장"이라고 설명하며, 이처럼 정치 군인들의 개입이 군대와 국민에게 얼마나 큰 비극을 가져왔는지 조명했다.
그는 중일 전쟁과 태평양 전쟁의 승인에 핵심적인 역할을 했으며, 그의 결정은 전쟁을 장기화하고 일본을 파국의 길로 이끌었다.
신인균은 "육군 대신인 스기야마 하의 원수입니다. 도조 희대기 내각에서 육군 대신을 했습니다. 그런데 완전히 정치 군인이죠."라고 말하며, 그가 순수한 군사 전문가라기보다는 정치적 야심이 강한 인물이었음을 시사했다.
도미나가 교지 중장은 능력은 없었지만 정치인, 군부, 재벌 사이를 오가며 뇌물 셔틀을 하는 등 부패한 방식으로 승승장구한 인물이다. 그는 필리핀 항공군 사령관으로 재직하면서도 기생집을 운영하는 등 비윤리적인 행태를 일삼았다.
신인균은 "도미나가 교지 중장, 이 자는 능력도 지질이도 없는데 정치인 그리고 군부 그리고 재벌이 사이를 돌면서 재벌들로부터 돈을 뜯어서 상납하는 뇌물 셔틀 하는 그런 능력을 가지고 승성 장군에서 장군까지 갔고"라고 말하며, 전세가 불리해지자 기생들과 함께 제일 먼저 도주하는 등 지휘관으로서의 자질이 전무했음을 지적했다.
1937년 7월 7일 밤 발생한 루거우차오 사건은 중일 전쟁의 단초가 되었다. 일본군은 의문의 총성과 병사 1명의 실종을 명분으로 중국군을 공격했으나, 실종된 병사는 사실 단순 복통으로 인한 설사 때문에 이탈했던 것이었고, 20분 만에 복귀했다.
무다구치 렌야는 이 사건 당시 연대장으로, 이러한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전쟁을 시작하게 만든 장본인이다. 병사의 일시적인 이탈을 빌미로 중국군에 대한 대규모 공격을 감행한 것은 그의 독단적이고 무모한 성향을 잘 보여준다.
이 사건은 사소한 오해와 허위 사실이 어떻게 전면적인 전쟁으로 비화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사례로 남아있다.
당시 연대장이었던 무다구치 렌야는 휘하 신병이 중국군의 공격으로 죽은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중국군과 일본군 간의 협상이 진행 중인 상황에서 그는 중대장의 정정 보고를 묵살하고 독단적으로 포사격 명령을 내렸다.
이 무모한 결정으로 중국군 60명이 사망했지만, 일본군의 피해는 없었다. 그는 심지어 팔을 다치지 않았음에도 깁스를 하고 선봉장 행세를 하며 언론 플레이를 펼쳤고, 이 사건이 결국 중일 전쟁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는 도조 히데키가 이끄는 파벌에 속해 있었으며, 이는 그가 육사 출신이 아닌 비주류임에도 불구하고 군내에서 득세할 수 있었던 이유가 되었다.
이러한 정치적 뒷배 덕분에 그는 사고 이후에도 소장으로 진급하고 관동군 제4군 참모장까지 역임하는 등 중요한 직책을 맡을 수 있었다.
싱가포르 전투가 한창일 때 무다구치 렌야는 사단장임에도 불구하고 전투에 참여하지 않고 기생집에서 음주가무를 즐겼다. 영국군이 폭격을 가하자 숨을 곳을 찾아 하숙으로 뛰어들다가 파편에 맞아 부상을 입는 추태를 보였다.
일본은 버마(미얀마)를 점령한 후, 미국과 영국이 중국 국민당 군대에 무기를 지원하는 루트를 차단하기 위해 인팔 작전을 계획했다. 이 루트는 방글라데시를 거쳐 히말라야 산맥을 넘어 운남성으로 이어지는 험난한 경로였다.
무다구치 렌야는 이 지역을 점령하여 중국에 대한 무기 지원을 끊고자 했지만, 인팔 지역은 험준한 산악 지형과 밀림으로 이루어져 있어 역대 지휘관들이 모두 작전 수행을 반대했던 곳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야망을 위해 무리하게 작전을 추진했고, 이는 결국 대참사로 이어졌다.
무다구치 렌야는 인팔 작전에서 상식을 벗어난 지휘 지침을 내렸다. 그는 "적과 조우시에 총구를 하늘로 올리고 세 발만 쏴라 하늘로 그러면 적이 항복할 것이다. 전투 안 한다. 그러니까 보고 필요 없어."라고 주장하며 실질적인 전투 계획 대신 황당한 지시를 내렸다.
또한 정글 지형임에도 불구하고 항공 지원의 필요성을 부정했으며, 보급로조차 확보하지 않은 채 행군을 강행하여 병사들을 극한 상황으로 내몰았다.
보급 문제에 직면하자 무다구치 렌야는 더욱 기상천외한 발상을 내놓았다. 그는 차량 대신 소나 말을 수송 수단으로 활용하고, 이들이 초식 동물이므로 사료는 현지에서 조달하면 된다고 주장했다.
그의 계획은 소와 말로 포탄을 나르다가 포탄을 다 쓰면 잡아먹어 식량으로 활용하자는 것이었으며, 이는 보급에 대한 그의 안일하고 비현실적인 인식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였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다. 소나 말은 아무 풀이나 먹지 못하며, 독초를 섭취하거나 굶주림으로 인해 대부분 폐사했다. 특히 3만여 마리의 소 중 상당수가 강을 건너다 떠내려가 죽는 등 대규모 손실이 발생했다.
결과적으로 수송 수단은 전멸했고, 이는 병사들의 식량난을 더욱 심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무다구치 렌야는 병사들에게 "야 일본인은 원래 초식 동물이다. 길가에 난 풀 먹으면서 격해."라고 말하며, 보급 부족에 대한 해결책 대신 정신 무장만을 강조했다. 병사들이 어려움을 호소하자 그는 "너들 정신 무장이 안 돼 있어. 사무라이 정신을 가져."라며 궤변을 늘어놓았다.
나아가 그는 보급은 적군으로부터 취해야 한다며, "돌격해 가지고 승리해서 적의 식량, 적의 포탄을 뺏어 그러면 돼."라고 명령하는 등 비현실적인 지시로 병사들을 사지로 내몰았다.
인팔 전투는 4개월 동안 이어진 대참사로 기록되었다. 9만여 명의 병력이 투입되었지만, 겨우 1만여 명만이 귀환할 수 있었다. 전투 중 전사자는 13,376명에 달했으며, 질병, 기아, 사고로 사망한 병력은 4만 명 이상으로 추정된다.
군마와 노새를 비롯한 모든 장비 또한 손실되어 일본군은 막대한 피해를 입었다. 이는 무다구치 렌야의 무능하고 비현실적인 지휘가 빚어낸 참혹한 결과였다.
31사단장 사토 고토쿠 중장은 무다구치 렌야의 비상식적인 지휘에 분노했다. 그는 "천황의 적자들을 개죽음으로 내몰지 말라"고 항의하며, 무다구치 렌야의 "명령만으로 병력이 움직인다"는 생각이 작전 실패의 중대 요인이라고 비판했다.
사토 고토쿠는 이대로 가다가는 사단이 전멸할 것이라 판단하고, 독단적으로 31사단의 철수를 명령했다. 그의 결단 덕분에 31사단은 소수의 병력이라도 보존하여 생환할 수 있었다.
전황이 좋지 않다는 보고가 들어오면 제단을 차려놓고 제사를 지내며 승리를 빌었을 뿐, 실질적인 대책은 마련하지 않았다.
그는 또한 "우리가 이기고 있다"는 가짜 언론 플레이를 통해 국민과 병사들을 속이는 데 급급했다. 이러한 그의 무책임하고 안일한 행태는 일본군 지휘부의 부패와 무능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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